코끼리보다 조금 작은 체구임에도 불구하고, 오록스는 매우 빠른 속도로 움직일 수 있어 종종 인간의 목숨을 위태롭게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특성 덕분에 고대의 사냥꾼들에게 오록스는 '힘의 상징'으로 여겨졌습니다. 이들은 오록스를 사냥함으로써 자신의 힘과 용기를 과시할 수 있었고, 이는 사냥꾼들 사이에서 큰 명예를 의미했습니다. 과거에는 오록스를 잡고 돌아오는 날, 그 사냥꾼은 동료들 사이에서 높은 위신을 얻게 되었고, 이는 곧 그의 사회적 지위를 높이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사냥꾼의 후손인 우리는 여전히 오록스의 후손인 소를 욕망합니다. 우리는 그 고기를 불에 구워, 포크와 나이프를 이용해 정성스럽게 썰어 먹습니다. 이러한 행위는 마치 고대의 사냥을 재현하는 듯한 느낌을 주며, “내가 이걸 입 안에 넣으면 육즙이 터지고 엄청 맛있을 거야.”라는 기대감이 들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스테이크에 대한 탐닉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인류가 동물을 사냥하며 생존하던 시절, 초원에서 만난 오록스는 그 자체로 두려움을 주는 존재였습니다. 그만큼 힘을 가진 동물을 사냥하는 것은 사냥꾼들에게 있어서 자신의 남성성을 과시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오록스를 사냥하여 돌아오는 날이면 그는 동료들로부터 존경과 찬사를 받았고, 이는 그의 자존감을 크게 높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약 8천 년 전,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 살던 인류는 오록스를 길들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오록스를 필요할 때 손쉽게 잡아 고기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이로 인해 오록스의 체구는 점차 작아지면서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소’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욕망은 종종 숭배로 변모하기 마련입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인들에게 소는 대지를 보살피는 어머니이자 남성적인 힘을 상징하는 존재였습니다. 이들은 소를 통해 자연의 힘을 느끼고, 그 힘을 경외하며 숭배했습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파라오를 신성한 수소로 여기고, 아피스(Apis)라는 이름의 황소 신을 섬겼습니다. 이러한 숭배는 더욱 확장되어, 알파벳 A 또한 욕망과 숭배의 대상으로서 소의 형상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A를 거꾸로 뒤집으면 '뿔이 달린 소'의 형상이 드러나며, 이는 고대 페니키아의 글자 알레프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이 글자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소'를 의미하는 고대 이집트의 상형문자와 연결됩니다. 페니키아인들이 이집트의 수많은 상형문자 중 소의 형상을 첫 글자로 삼았다는 것은 고대 사회에서 소가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지녔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그러나 인간이 자연을 보다 통제할 수 있게 되면서, 소에게서 신성한 가치는 점차 사라졌습니다. 대신에 실용적 가치가 우세해졌으며, 이는 고대 로마인들이 소를 대하는 태도에서 잘 드러납니다. 로마인들은 소를 경제적 자원으로 인식하며, 농업과 축산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이처럼 오록스와 소는 인류의 역사 속에서 끊임
없이 변화해왔으며, 그 과정에서 우리는 고기를 통해 자연과의 관계를 재조명하게 되었습니다. 스테이크를 즐기는 행위는 단순한 식사가 아니라, 우리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인간성과 연결된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당시 로마인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거대한 원형 경기장을 지었고, 그곳에서는 고대 사냥꾼들의 오록스 사냥을 재현하는 장면이 벌어졌습니다. 검투사들이 칼이나 창을 사용하여 황소의 심장을 찌를 때, 관중들은 열광의 환호성을 터뜨렸습니다. 이러한 장면에서 신성한 의미는 사라지고, 단순히 인간의 힘과 자연에 대한 지배욕구만이 남아 있었습니다. 이는 로마 사회의 권력 구조와 그들이 자연을 어떻게 다루고 있었는지를 반영하는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2. 소고기 먹는 사람들] 로마의 신성한 자리에서 쫓겨난 후, 소는 그 실용적 가치가 크게 두 가지로 나뉘게 되었습니다. 첫 번째는 농사일을 돕는 가축으로서의 역할이었고, 두 번째는 식량으로서의 가치였습니다.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거주하던 노르드인들은 초원에서 소나 양을 기르며 살아갔습니다. 이들은 큼직하게 썬 고깃덩어리를 꼬챙이에 꿰어 불에 굽는 요리를 즐겼고, 이 요리가 바로 ‘스테이크’(steik)라는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8세기부터 노르드인들은 바다로 나아가 유럽과 지중해 등지에서 약탈을 일삼았고, 이들 중 일부는 9세기 말 센강 하류에 정착하여 노르망디 공국을 세우게 됩니다. 1066년에는 잉글랜드까지 정복하면서, 노르망디 출신의 왕과 귀족들이 잉글랜드의 상류층을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고향에서와 마찬가지로 소고기나 양고기를 이용해 스테이크를 만들어 먹었고, 이것이 영어에서 스테이크라는 단어가 정착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스테이크가 전해졌다고 해서 모든 이가 그것을 먹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스테이크는 대개 소고기로 만들어졌으며, 대다수 농민들에게 소는 농사일을 돕는 중요한 동물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소고기를 먹는 것은 단순한 식사를 넘어, 일종의 금기와도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배경으로 인해 17세기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스테이크는 ‘선망의 음식’으로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18세기 초, 잉글랜드가 스코틀랜드를 병합하여 영국을 형성했을 때, 이 새로운 나라에서 상류층의 특권이었던 스테이크가 중산층에게로 확산되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영국인들은 집이나 사교 모임, 식당에서 스테이크를 즐기기 시작했고, 이는 사회적 변화의 중요한 지표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변화가 가능했던 이유는 18세기 중반, 영국에서 일어난 산업혁명 덕분이었습니다. 사람의 힘 대신 증기의 힘으로 움직이는 기계가 개발되면서, 영국은 값싼 면직물을 대량 생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영국산 면직물은 전 세계에서 불티나게 팔리게 되었고, 이는 경제적 여유를 가져왔습니다. 이러한 경제적 변화는 중산층의 생활 수준을 높였고, 그들은 이제 스테이크와 같은 고급 음식을 즐길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된 것입니다. 스테이크는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시대와 사회의 변화에 따라 그 의미와 가치가 끊임없이 변모해온 역사적인 상징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고대의 힘의 상징에서 현대의 대중적인 음식으로 자리 잡기까지, 스테이크는 인간의 욕망과 문화를 반영하는 중요한 요소로 남아 있습니다. 현재 스테이크는 단순한 고기를 넘어, 사람들의 삶의 질을 상징하는 음식으로 자리 잡았으며, 다양한 문화와 사회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널리 사랑받고 있습니다 영국으로 흘러들면서, 먹고 살만해진 사람들은 ‘선망의 음식’으로 여겨지는 스테이크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식사가 아니라, 사회적 지위와 개인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중요한 상징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정체성은 포함에 관한 것만큼이나 배제에 관한 것이기도 합니다. 다른 지역에서는 소고기가 여전히 사치품으로 여겨졌던 시기에, 영국인들은 남다른 시각으로 소고기를 ‘모두의 음식’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스테이크를 즐기는 행위가 자신들만의 독특한 특징임을 자각하게 되었고, 이는 곧 영국을, 영국인의 힘을, 그리고 영국의 번영을 상징하는 요소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19세기에는 영국이 스테이크를 즐기며 소처럼 러브링돌진해 나갔습니다. 아메리카, 아프리카, 아시아, 오세아니아 등지에 식민지를 건설하면서, 영국은 새로운 ‘힘의 상징’으로서의 위상을 확립하며 ‘새로운 로마’로 거듭났습니다. 고대 로마의 검투사들이 칼과 창을 들었던 것처럼, 근대 영국인들도 자신들만의 작고 귀여운 칼과 창을 들고 스테이크를 찌르고 썰었습니다. 비록 그 과정에서 비명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그릇 안에는 피처럼 보이는 육즙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스테이크를 먹는 행위는 본질적으로 작게 재현된 사냥을 의미하게 되었고, “피를 좋아하면 천성이 호전적인 거지!”라는 말이 떠오르는 순간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배경 속에서, 19세기 영국의 번영이 지속됨에 따라 스테이크에 대한 수요는 날로 증가했습니다. 그동안 영국에 소고기를 공급했던 주요 지역은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였으나, 이제 이러한 지역만으로는 증가하는 소고기 수요를 감당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영국인들은 새로운 목초지를 찾아야만 했고, 그 시선은 자연스럽게 대서양 건너편에 있는 미국으로 향했습니다. 미국은 과거 영국의 식민지로, 1783년에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이후로 서쪽으로 나아가는 것이 ‘명백한 운명’이라 여겼습니다. 특히 1803년에는 프랑스로부터 루이지애나를 매입하고, 1846년에는 멕시코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텍사스에서 태평양에 이르는 방대한 땅을 손에 넣게 되었습니다. 영국이 미국 중서부의 대평원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던 시점, 미국 또한 서부를 개척하는 한창의 시점에 있었습니다. 이때 소고기를 확보하려는 영국 자본이 미국의 서부 개척에 가세하게 되면서, 미국의 동부와 서부를 연결하는 철도 부설 사업은 한층 더 탄력을 받게 되었습니다. 1869년, 철도가 마침내 동서의 연결을 이루었을 때, 통신사 웨스턴유니온은 이렇게 타전했습니다. “이제 미국은 동서가 연결되어 하나의 대륙으로 통합되었습니다.” 이는 단순한 교통의 연결을 넘어서, 경제적, 사회적 통합을 의미하는 중요한 이정표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렇게 스테이크는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정치적, 경제적 맥락 속에서 영국과 미국 사이의 관계를 상징하는 중요한 요소로 부각되었습니다. 스테이크를 즐기는 것은 단순한 식사가 아니라, 각국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각각의 정체성을 반영하는 행위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영국과 미국의 발전 과정에서 스테이크는 서로 다른 두 국가가 어떻게 서로의 문화를 흡수하고 변형해 나가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이 표현은 ‘영국의 시대가 저물었다’는 도발적이고도 상징적인 선언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대륙을 가로지르는 철도의 완공 이후, 모든 것이 변화의 물결에 휩싸였기 때문입니다. 영국인들은 그토록 갈망하던 것을 드디어 손에 넣게 되었고, 이는 단순히 교통수단의 발전을 넘어서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중서부에서 자란 소들은 이제 철도를 통해 시카고로 운송되었고, 이곳에서 도축과 포장을 거쳐 대서양을 건너 영국의 식탁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덕분에 영국인들은 더 이상 소고기 부족을 걱정하지 않고, 다양한 요리의 중심인 스테이크를 마음껏 즐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미국의 뉴욕에서도 영국으로 향하는 소고기가 집결되면서 스테이크를 즐길 수 있는 레스토랑과 식당들이 속속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미국인들도 영국인들처럼 ‘번영의 음식’인 스테이크를 맛보며, 새로운 시대의 주인공인 ‘다음 시대의 영국’이 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19세기 말에 접어들면서, 시카고의 도축공장들은 점점 증가하는 소고기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생산 공정을 효율적으로 개선할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그 결과, 혁신적인 ‘컨베이어 시스템’이 개발되었습니다. 소 한 마리를 처리하기 위해 여러 명의 노동자가 몰려드는 대신, 이 시스템은 소를 컨베이어에 매달아 이동시키고, 각 노동자는 정해진 업무를 반복적으로 수행하도록 했습니다. 누군가는 소를 도축하는 작업을 전담하고, 누군가는 배를 가르는 일을 맡았으며, 또 누군가는 청소와 세척만을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새로운 시스템의 도입은 놀라운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이전에는 하루에 겨우 80여 마리의 소를 처리하던 공장이 새로운 시스템을 채택한 이후에는 그 수가 무려 1,000여 마리로 증가하게 된 것입니다. 이 혁신적인 변화를 유심히 지켜본 인물 중 한 명은 바로 ‘자동차 왕’ 헨리 포드였습니다. 그는 소를 해체하는 과정을 반대로 적용하면 자동차를 조립하는 데에도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1913년, 포드는 자신의 컨베이어 시스템을 선보였고, 이로 인해 1910년에는 연간 2만 대에 불과했던 자동차 생산량이 1914년에는 27만 대로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되었습니다. 소고기와 자동차의 생산 방식이 서로 엮이면서, ‘미국식 자본주의’의 대량 생산 시대가 열리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전례 없는 생산량을 바탕으로 미국은 압도적인 경제력을 구축할 수 있었습니다. 20세기에는 새로운 ‘힘의 상징’으로 자리 잡게 되었고, 국가와 기업의 성장은 개인의 성장과 밀접하게 연결되는 구조가 형성되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미국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나타나는 혁신의 시작점이 되었으며, 경제적 풍요는 사람들의 개인 생활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스테이크와 자동차의 생산 방식이 서로 연결되면서, 인간의 삶은 새로운 단계로 나아갔습니다. 대량 생산의 시대는 단순히 생산성을 높이는 것을 넘어, 소비자의 생활 방식과 문화까지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이제 더 많은 선택의 자유를 가지게 되었고, 이는 곧 소비 문화의 발전으로 이어졌습니다. 스테이크는 더 이상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풍요와 성공의 상징으로 자리 잡게 되었고, 이는 개인의 정체성과도 깊은 연관을 맺게 되었습니다. 결국, 스테이크는 단순한 식사를 넘어, 사회적 지위와 개인의 성장을 상징하는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았습니다. 사람들은 스테이크를 통해 자신의 성공을 과시하고, 이를 통해 자신이 속한 사회의 일원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게 되었습니다.